SLR클럽 원문링크 https://m.slrclub.com/v/free/30438771

◎ 연산군(燕山君) 1476~1506
조선 제 10대 왕(재위 1495~1506), 휘(諱)는 융(隆), 성종의 맏아들 즉위3년 동안은 순탄했으나 1498년(연산군4) 훈
구파(勳舊派) 이극돈(李克墩). 류자광(柳子光) 등의 계략에 빠져 사초(史草)를 문제삼아 김종직(金宗直)등 많은 신진
사류(士流)를 죽이는 최초의 사화(士禍)인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키게 하였다 1504년에는 생모인 폐비윤씨가 내쫓
겨 사사(賜死)되었다고 해서 자기손으로 두 후궁을 죽여 산야에 버리는 포악한 성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또한 조모
인수대비(人粹大妃)를 병상에서 죽게하고 윤씨의 폐사에 찬성 하였다
이어 윤필상(尹弼商). 김굉필(金宏弼)등 수십명을 살해하고 이미죽은 한명회(韓明澮) 등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였다
연산군은 한글 교습을 중단 시키고 언문구결(諺文口訣)을 모조리 거두어 불태웠다 또한 각 도에 채홍사(採紅使)채청사
(採靑使) 등을 파견해서 미녀와 양마(良馬)를 구해오게 하고 성균관의 학생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놀이터를 삼는등 방탕
한 생활을 일삼았다 1506(중종1)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등이 일으킨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의해 폐왕이 되어
교동(喬桐 : 江華)으로 쫓겨났으며 연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병사하고 말았다

◎ 인조(仁祖) 1595~1649
조선 제 16대 왕(재위 1623~1649),휘(諱)는 종(倧),자는 화백(和伯), 호는 송창(松窓), 원종의 아들. 선조의 손자. 1607년(선조40)능양도정(綾陽都正)에
수봉(受封)되었다가 이어 능양군(綾陽君)에 봉군 되었다 .광해궁(光海君)의
폭정으로 반정을 일으켜 1623년 광해군을 몰아내고 경운궁(慶運宮)에서 즉위 함으로써 인조반정이 성공 되었다 즉위하
자 광해군때 희생된 영창대군(永昌大君) 의(의) 임해군(臨海君) 진(진)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 등의
관직(官職)을 복관 시켰으며 반정공신(反正功臣)에게는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였다
1627년 청병(淸兵)의 침입으로 정묘호란(丁卯胡亂)을 당하여 강화도에 피난하였다가 형제국(兄弟國)의 의를맺고 화의하
였고 1636년에는 다시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당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항거하다가 척화파(斥和派).주화파(主和
派)와의 치열한 싸움 끝에 인조자신이 성을 나서서 삼전도(三田渡)에서 청의(淸依)를 입고 치욕적인 항복을 하고 군신
(君臣)의 의를맺어 소현세자(昭顯世子). 봉림대군(鳳林大君)의 두 왕자를 심양(瀋陽)에 인질로 보내었다 1639년에는 청
나라의 요구대로 삼전도에 대청황제 고덕비(大淸皇帝功德碑)까지 세웠다 능은 교하(交河)의 장릉(長陵)이다

◎ 선조(宣祖) 1552~1608
조선시대 제 14대 왕(재위 1567~1608),초휘는 균(鈞), 휘(諱)는 공(公), 시호는 소경(昭敬), 덕흥대원군(德興大院
君) 招(초)의 세째아들, 어머니는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鄭氏), 비(妃)는 박응순(朴應順)의 딸 의인왕후
(懿仁王后), 계비(繼妃)는 김제남(金悌男)의 딸 인목왕후(仁穆王后), 처음에 하성군(河城君)에 봉해졌는데 1567년(명
종22)명종이 후사(後嗣)없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처음에는 이 황(李 滉), 이 이(李 珥)등 많은 인재를 등용 하여 국정 쇄신에 노력 하였으며 유학을 장려 하가도 하였다
그러나 75년(선조8)이후 치정의 방향을 잡지 못하다가 북변에서는 83년과 87년 두차례에 걸쳐 야인(野人)의 침입이 있
었다 남쪽에서는 왜세(倭勢)가 위협적으로 팽창하여 통신사 김성일(金誠一)을 왜국에 보내어 사정을 살피게 하였으나 당
파를 달리하는 두사람의 보고가 상반되어 국방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허송하다가 임진왜란을 당하게 되었다 그는 의주(義
州)에 까지 피난을 하여야 하는 시련끝에 명나라의 원조와 이순신등의 선전(善戰)으로 왜군을 물리 칠수 있었으나 전후
의 복구사업을 할 겨를도 없이 다시 당쟁이 일어났으니 순조로운 정치를 하지못한 채 광해군에게 계승되었다
--------------------
연산군 = 드록바
선조 = 호날두
인조 = 메시
솔까 저 자료도 다 못믿겠단...........ㅎㄷㄷㄷㄷ
원래 광해군 이후로 나라꼴이 엉망이라 임진왜란은 어쩔수가 없었죠 선조는 그것보다 자신의 정권유지를 위해 나라를 위해싸워왔던 의병장을 숙청했다는거죠
엥 무슨 말씀인지;; 광해군은 선조 아들인데유... 글고 임진왜란 나서 사실상 조선을 이끈 건 광해군이엇는데요, 초창기에 총명한 걸로 치면 광해군만한 인물도 없는디;; 왕되고 나서는 폭군이었지만... 선조는 폭군이라기 보단 정치꾼 모사꾼에 가까운 이미지네유... 선조가 더 나쁘다고 봐유 이승만이랑 머가 다르냐는...
광해군이 폭군은 아니죠...
폭군이란 백성에게 강압적인 군주를 말하는데 광해군은 백성에게 강압적이진 않았습니다
광해군이 강압적인 세력은 당시의 정치권력의 정적들인 서인세력에게 강압적인것 뿐이죠.
광해군 이후로 임진왜란이라니 ;;; 광해군 이후면 병자호란입니다 ㄷㄷ
선조는 콤플렉스가 심해서 ㄷㄷ
임진왜란이 왜 어쩔수 없었냐는...;;
10만 양병만 제대로 훈련했음 충분히 막고도 남았음을...
충무공 이순신을 포용하기 어려웠던 좁은 그릇을 가진 선조는 군주로서의 자격미달...
10만양병설은 서인들의 기록으로된 선조신록에 한줄 남아있을뿐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역대시험에서 10만양병설이 문제가 된 적도 없습니다. 10만양병설의 내용도 시대적으로 앞뒤 안맞기로 유명하고요. 실제로 조선에서 전시에 10만이 넘는 전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개털렸습니다. 명나라도 임란이후 휘청했고요.
포르투갈에서 들여온 조총이란 무기가 넘사벽인데 육지전에서 어쩔수 없었습니다. 칼들고 달려들면 뭐합니까 조총에 완전 털렸는데. 탄금대 신립장군이 조선의 병력을 집중해서 싸웠지만 전멸했죠. 신립장군이 결코 무능력한 장수도 아니였는데요.
연산군은 비교불가 최악보다 다른존재고 최악은 인조
선조가 광해군에게 열등감을 느꼈을거란 기분이 드는건 저뿐만이 아니겠죠?
연산군이야 오리지날 농축생떠라이여서 두 말 하면 입 아프고....
무능함으로 따지면 고종도 못지않죠... 조선 대대로 세종과 정조 임금님정도만 되었어도 태평성대의 초 강대국이 되었을지도.....ㄷㄷ
개인적으로 저도 고종... 말그대로 무능력했다는..
그리고 정조도 정말 훌륭하신 분인데.. 후대에 제대로 물려주지 못한점이 아쉽네요.
우리나라 역사책이 개 똥같은데....
그걸 뭘 믿고...
선조가 어쩌고 연산군이 어쩌고 함....
고려 역사를 지우개로 지워버린 조선의 역사 인식을 보면..........
조선의 역사 기록 자체도 의심이 됨
갑오브갑은 선조같음 유명한 판타지 소설에서도
김덕령일화는 많이 다루어질정도니 인조야 사실 관심없고
연산군은 초창기에는 상당히 의욕있어보였는데
급폭주... 숨겨진 비화를 모르니 뭐라 판단은 못하겟음
근데 솔직히 고종은 좀 억울한 면도 있음
정조이후 쭉 내리막길을 걸어 만신창이가 된 조선이였는데 시대도 또 한창 아시아가 서구열강들에
시달릴때라 여러가지가 겹쳐서 손쓰기가 정말...게다가 아버지의 쇄국정책과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파워게임속에서 여러번 개혁할 기회를 놓치고..
총명하기로 따지자면 두말할 나위 없었다고 평가되는 왕임
어차피 역사야 결과가 평가를 하니..나라 잃은 거에 대해선 변명할 건 아니지만
유전자를 물려주는 것으로 지도자를 선출하는 방식이 얼마나 큰 위험인지를 알수있죠... 훌륭한 왕도 있었지만... 정말 ㅜㅜ 일반인들보다 못한 판단력의 사람이 왕이 될 수도 있는게 왕정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