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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김일성에게 업적을 뺏긴 비운의 독립군 사령관.jpg +3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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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에게 업적을 뺏긴 비운의 독립군 사령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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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군의 총사령관 양세봉


1929년 설립되어 약 10여년간 만주 일대 최대의 항일부대를 이끈 독립군 장군이자.

23세에 독립군에 투신하여 15년을 조국 광복에 바친 잊혀진 애국자이다.



10326-2-10325.jpg 김일성에게 공적을 빼앗긴 비운의 독립운동가 양세봉.

조선혁명군은 자유시 참변 이후 공산주의 좌익계가 파벌별로 나뉜 상황에서 참의부(좌우합작), 정의부(민족주의), 신민부(아나키스트) 등이 민족유일당 조직운동에 동참하여 통합을 이루고 세워진 군대이다.


상술한 대로 민족주의 우파+온건 좌파+아나키스트들이 결합한 좌우합작의 부대였으며, 일부 공산주의자, 강성 우파들도 참가했었으나 이들은 이내 각각 조선공산당 만주부 재건위, 촉성회로 이탈한다.


전성기 당시 그 규모는 약 1만여명에 이르렀지만, 보급 문제로 무장 병력의 규모는 그 70% 수준이었다고 한다. 복식과 군제는 만주국 관동군 병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념적으로 조선혁명군정부는 의회주의를 기반으로한 자유민주주의 사상과 경제적 재분배를 통한 사회주의를 혼합하는 것을 추구했으며, 코민테른의 지령으로 '1국가 1공산정당'론을 추종한 타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과는 다른 사회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목표로 했다.


실질적인 정부의 기능을 수행하며 재만 한인들에게 세금을 거두기도 했으나, 흉작/재산상황을 고려해 세금을 면제하는 등 현지민들의 민심을 챙겼다.



eh_n0820_p01.jpg 김일성에게 공적을 빼앗긴 비운의 독립운동가 양세봉.

이들은 영릉가, 흥경성에서 2만여명의 중국 항일부대와 연합하여 작전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병력 규합의 시기에 논란이 많은 조선의용대를 제외하고 독립운동사 속 최대의 단일 군사조직이였다.


양세봉 장군은 이들을 이끌고 20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접전을 벌였다.


1919년 만주지역 만세운동을 조직하던 청년 양세봉은 1920년대 사이코 마코토 총독 습격작전을 진두지휘하는 등 이미 십여년간 독립전쟁에 투신했다.


본인 자신의 성향은 확고한 반공 우파였음을 살아남은 그의 동지들이 증언했으나,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너무 극단적이지만 않다면 다양한 세력과 연대하는 유연한 자세를 가진 인물이었다.


1932년 양세봉 장군은 140명의 조선혁명군 유격대원들을 국내로 파견했고, 황해도 일대를 중심으로 넓은 지역에서 전투를 수행했다.


해방 이후 국군 사단장을 지낸 최석용 장군은 양세봉 휘하로 평안북도에서 1개 기병대대를 격파했고


(최석용은 훗날 전투중 패배하고 일본군에 항복한 뒤 일본군에 입대해 조선혁명군에게 총부리를 돌린다. 해방 이후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된 '국군 서청대대'를 조직, 제주도민 학살의 책임자로 손꼽힌다.)


일본 식민당국이 전북 일대에 매복해 봉기를 준비하다 격퇴된 조선혁명군 병력에 대한 기록을 남겨놓기도 했다.


1936년 중순까지 조선혁명군은 약 4년간 국내 일제 통치기관에 대한 유의미한 파괴와 습격을 행했다. 



양세봉 장군의 연설에는 민중을 이끄는 힘이 있었다.


  • 친애하는 동지들, 이번 전투는 동포 동지들의 생사를 담판하는 결전입니다. 나를 따라 생명을 각오하는 동지들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 조국 광복군과 동만 백만 동포들의 생명을 두 어깨에 짊어진 우리는 일당백의 용감한 정신과 아울러 이번 전투에 승리의 믿음을 선포합니다 -양세봉 -


중국 사서들은 그가 기의할때마다 수천명의 조선인이 함께 들고일어섰으며, 당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중국계 군벌과 조선인들또한 그의 부탁이라면 손을 잡았다고 말했다.


그의 병력이 주둔했던 중국 신빈현 왕청문 일대는 재만 한인들에게 '서울'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의 명성은 대단했다.


흥경성과 영릉가에서 1만의 조선혁명군을 이끌고 항공지원까지 등에업은 일본군을 격파한 그는 만주에 남은 항일 무장투쟁세력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하지만 1934년, 일본에게 매수된 밀정이 조선혁명군과 중국 항일부대의 회의 장소를 발설하였다.


항복을 종용하는 밀정의 외침에 양세봉 장군은 항전으로 화답했다.


무제.png 김일성에게 공적을 빼앗긴 비운의 독립운동가 양세봉.

"일본의 버러지들과 나눌 말은 없다."


양 장군은 20년을 바친 독립투쟁의 끝을 순국으로 물들였다. 향년 38세였다.





지도부를 잃은 조선혁명군은 와해되기 시작했고 수 차례의 패배를 거친 끝에 1938년에는 150여명 남짓만이 남았으며, 9월 마지막 총사령관 김활석이 교전 중 일본군에게 패배하고 항복한 뒤 행방불명이 되면서 민족통일당 운동에 동참하던 통의부 이후 약 20여년간 이어진 좌우합작계열의 만주 지역 독립운동은 종결을 맞이한다.



생존자들은 충칭 임시정부로 이동해 해방 이후 대부분 여운형/김규식의 좌우합작운동에 동참했다가 한국 독립당으로 규합되어 남한에서 원로 정치인이 되었다.



D4ejTYHhrV-Wv0MZiNQnuAWJaXJaocklzosLI5bZa3dgj-TqZew_ul1aC4h-ejlpV4nCI2eqqHr-5quJBGDZRw-1.webp 김일성에게 공적을 빼앗긴 비운의 독립운동가 양세봉.


조선혁명군은 사실상 만주지역 독립군 해방구에서 정부의 기능을 십수년간 수행했기 때문에, 그 명칭의 의의는 매우 중대했다.


몇 차례 동북항일연군의 소대장으로 병력상 100배는 커다랬던 조선혁명군과 연합작전을 펼쳤던 김일성 또한 이런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미 양세봉 장군이 살아있던 동안에도 김일성은 그 위명에 기대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북한 역사서는 "1934년에 이르러 김일성은 동만주의 반일 인민유격대와 남만주 반일유격대를 통합하여 조선인민혁명군을 창설하였으며, 그 이듬해인 1935년 5월에는 반일 민족 통일전선 본보인 조국광복회를 조직하고 그 회의 회장으로 추천되었다"고 가르치며 공산주의 계열이 아니었던 조선혁명군이 최고점에 이르렀던 1934년경 마치 김일성 휘하의 부대로 창설된듯 윤색하고 있다.


김일성 또한 자서전에서 "당시 유격전을 벌일때 그냥 융통성 있게 자신이 조선혁명군 소속이라고 하는 등 때마다 이름을 다르게 댔다"고 주장했다고 소회를 남기기도 했다.


아주 후하게 좌익적으로 해석한다 해도 1938년 조선혁명군의 와해 이후 소수 인원이 무장투쟁을 이어가기 위해 김일성과 같은 부대에 있었을 정도일 뿐으로 추정할 수 있다.


'김일성 본인이 독립운동을 안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일부 종북주의자들과 북한(심지어 중국의 학계 절대다수도 조선혁명군은 김일성의 부대가 아니라고 못박음)이 주장하는것처럼 양세봉 장군과 조선혁명군의 투쟁을 김일성의 것으로 윤색하는 주장을 가려 보아야 한다.






그냥 '저분 공적을 빼앗아서 조선인민혁명군 ㅇㅈㄹ한것으로 추정됨'이 아니라 김일성이 직접 자기가 그랬다고 털어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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